미즈하라 시게루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미즈하라 시게루는 일본의 야구 선수이자 감독, 야구 평론가이다. 선수 시절에는 고시엔 대회에서 우승하고,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활약했으며, 도쿄 교진군(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전신)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감독으로서 요미우리 자이언츠에서 리그 3연패와 일본 시리즈 3연패를 달성하며 '제2기 황금 시대'를 열었고, 도에이 플라이어스와 주니치 드래건스 감독을 역임했다. 특히 요미우리 감독 시절에는 라이벌 미하라 오사무가 이끄는 니시테쓰 라이온스와의 일본 시리즈 대결로 '간류섬의 대결'을 펼쳤다. 1977년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으며, 1982년 간부전으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다카마쓰시 출신 - 니시오 스에히로
니시오 스에히로는 일본의 노동운동가 출신 정치인으로, 사회민중당, 사회대중당을 거쳐 일본사회당에서 우파를 이끌었으며, 민주사회당을 창당하여 안보 문제에서는 야당과, 다른 안건에서는 자민당과 협력하는 독자 노선을 걸으며 국수주의적 성향과 반공주의적 입장을 보여 논쟁적인 평가를 받았다. - 다카마쓰시 출신 - 나카무라 유이치 (성우)
나카무라 유이치는 독특한 저음으로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클라나드》의 오카자키 토모야, 《주술회전》의 고죠 사토루 등의 대표작을 통해 인지도를 높인 일본의 성우로, 크런치롤 애니메이션 어워드에서 최우수 성우상을 수상하고 유튜브 채널 "와샤가나 TV"를 운영하며 활동하고 있다. - 가가와현 출신 야구 선수 - 곤도 아키히토
곤도 아키히토는 일본의 프로 야구 선수이자 지도자로, 다이요 웨일스에서 2루수로 활약하며 1960년 일본 시리즈 MVP를 수상했고, 은퇴 후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 지바 롯데 마린스 감독을 역임했다. - 가가와현 출신 야구 선수 - 미하라 오사무
미하라 오사무는 혁신적인 야구 이론과 용병술로 일본 야구계에 큰 영향을 미친 야구 선수이자 감독으로, 선수 시절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계약 선수 1호였으며, 니시테쓰 라이온즈를 지휘하며 일본시리즈 3연패를 달성하는 등 명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 시베리아 억류자 - 우노 소스케
우노 소스케는 자유민주당 소속의 일본 정치인으로, 외무대신 등 요직을 거쳐 제75대 내각총리대신을 지냈으나 여성 스캔들로 인해 69일 만에 사임하며 최단명 내각 중 하나를 이끌었고, 시베리아 억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저서를 출판하기도 했다. - 시베리아 억류자 - 사토 슌지
사토 슌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중국과 만주에서 생물무기 개발 및 사용에 관여한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전쟁범죄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며 그의 행위는 심각한 인도주의적 문제를 야기했다.
미즈하라 시게루 | |
---|---|
기본 정보 | |
![]() | |
이름 | 미즈하라 시게루 |
원어 이름 | 水原 茂 |
로마자 표기 | Shigeru Mizuhara |
출생일 | 1909년 1월 19일 |
출생지 | 가가와현 다카마쓰시 |
사망일 | 1982년 3월 26일 |
사망지 | 도쿄 |
신장 | 170 |
체중 | 64 |
포지션 | 내야수 / 감독 |
타석 | 우 |
투구 | 우 |
선수 경력 | |
프로 입단 년도 | 1936년 |
첫 출장 | 1936년 |
최종 출장 | 1950년 |
소속팀 | 도쿄 자이언츠/요미우리 자이언츠 (1936–1950) |
감독 경력 | |
소속팀 | 요미우리 자이언츠 (1950–1960) 도에이 플라이어스 (1961–1967) 주니치 드래건스 (1969–1971) |
타격 기록 (일본 야구 리그/일본 프로 야구) | |
타율 | 0.243 |
홈런 | 12 |
안타 | 476 |
타점 | 184 |
도루 | 69 |
수상 내역 | |
MVP | 일본 야구 리그 MVP (1942) |
리그 우승 | 9회 (1936, 1937, 1938, 1939, 1940, 1941, 1942, 1943, 1949) |
일본 시리즈 우승 | 5회 (1951, 1952, 1953, 1955, 1962) |
명예의 전당 | |
유형 |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 |
헌액일 | 1977년 |
헌액 방법 | 선수 선정 위원회 |
2. 선수 경력
미즈하라는 1931년과 1934년 메이저 리그 선발팀 방일 때 전일본팀 멤버로 선출되었다. 1936년 가을에 자이언츠에 입단하여 마에카와 하치로를 대신해 주전 3루수가 되었다. 이후 주로 2번이나 3번 타순을 맡았고, 1937년 가을 리그에서는 타율 0.290, 31타점으로 팀 내 2위를 기록했다. 사와무라 에이지가 징집으로 팀을 떠난 1938년 가을 리그에서는 투수로도 활약하여 스타르힌에 이어 8승(2패), 평균자책점 1.76(리그 2위)을 기록했다. 1939년부터 주장을 맡았고, 1940년에는 베스트 나인에 선정되었다. 1942년에는 징집으로 8월 시즌 중반에 팀을 떠났음에도 불구하고, 인망이 두터워 최우수 선수로 선정되었다.[23]
전쟁 중에는 아시아 대륙으로 건너가 시베리아 억류를 경험했다. 1949년 7월 20일 마이즈루 항에 귀국하여 4일 후 오전 10시 30분에 도쿄역에 도착, 곧바로 고라쿠엔 구장으로 가서 자이언츠 대 다이에이 전(더블헤더) 경기 전에 "미즈하라 시게루, 이제 돌아왔습니다"라고 말하며 팬들에게 귀환을 알렸다. 이미 40세였지만, 팬들의 요청과 요미우리 신문사의 권유로 현역으로 복귀했다.[5] 그러나 시베리아 억류 중 극심한 영양실조로 인해 쇠퇴하여 복귀 시즌에는 공식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2리그제가 되고 감독이 된 1950년에는 감독 겸 선수로 7경기에 출전하는 데 그쳤다.
2. 1. 아마추어 시절
미즈하라는 어릴 때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재혼으로 ‘미즈하라’(水原일본어)라는 성을 갖게 되었다. 야구를 시작한 것도 이러한 가정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28]구제 가가와 현립 다카마쓰 상업학교 시절, 선배 미야타케 사부로(한큐 브레이브스 초대 주장)와 함께 고시엔 대회에 출전하여 투수와 3루수로 활약했다. 1925년 하계 대회와 1927년 하계 대회에서 두 차례 전국 우승을 차지했다. 미즈하라와 미야타케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도 선후배이자 팀 동료로 좋은 관계를 이어갔다. 게이오기주쿠 대학 시절 도쿄 6대학 야구 연맹의 스타 선수로 활약하며 춘계·추계 리그 통산 5회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사과 사건’과 마작 도박에 연루되어 야구부에서 제명되었다. 리그 통산 타자 기록은 63경기 출전, 193타수 48안타, 타율 0.249, 24타점이며, 투수 기록은 30경기 등판, 13승 8패이다. 야구부에서 제명되었지만, 이후 게이오기주쿠 대학의 학생 신문 ‘게이오 스포츠’의 제자를 담당했다.
와세다 대학의 미하라 오사무와는 프로 진출 후에도 라이벌 관계였다. 1931년 6월 14일 소케이센 2차전에서 미하라가 미즈하라를 상대로 홈스틸을 성공시켜 와세다 대학이 승리했는데, 이는 소케이센 역사상 최고의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2. 2. 프로 선수 시절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과 아버지의 재혼으로 '미즈하라'(水原일본어)라는 성을 갖게 되었으며, 집안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일종의 위안으로 야구를 시작했다.[28] 1949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 선수들이 미하라 오사무 감독에 대한 배척 소동을 일으켰고, 그 흐름에 휘말려 1949년 12월 31일에 제7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1949년에 팀을 전후 첫 우승으로 이끈 미하라는 총감독으로 밀려났다. 이는 미하라의 미즈하라에 대한 처우에 불만을 갖고 있던 선수들 대다수가 쿠데타를 일으켜 사실상 지휘권을 빼앗았다는 것이 정설이다. 하지만 미즈하라 본인은 모의에 참여하지 않았고, “우승으로 이끈 감독이 그만두게 되는 것은 비논리적이다”라고 말하며 감독 취임에 반대하고 있었다고 한다.선수 겸임 감독이었던 1950년에는 3위로 시즌을 끝냈지만, 1951년부터 1953년까지 리그 3연패와 일본 시리즈 3연패를 동시에 달성하면서 요미우리의 ‘제2기 황금 시대’를 열었다. 당시 팀에는 요나미네 가나메, 가와카미 데쓰하루, 치바 시게루, 히로타 준, 벳쇼 다케히코 등 유명한 선수들이 있었다. 하지만 1954년에는 스기시타 시게루를 필두로 한 주니치 드래건스에게 밀려 2위를 차지했다.

이 기간 동안 미즈하라의 감독 취임 4년째인 1953년부터 유니폼에 검은색과 주황색의 팀 컬러를 도입했다(메이저 리그의 뉴욕 자이언츠를 모델로 삼았다). 1955년에는 다시 독주하여 리그 우승을 달성했고 같은 해 일본 시리즈에서 난카이 호크스와의 네 번째 대전이 성사됐다. 요미우리는 1차전에서 승리했지만 2차전부터 내리 3연패를 당해 일본 시리즈에서 처음 강수를 두었다. 미즈하라는 5차전에 들어가기 전 포수를 히로타 준에서 후지오 시게루, 2루수를 치바 시게루에서 나이토 히로후미, 좌익수를 히가사 가즈오에서 가쿠라이 미노루를 기용하는 등 젊은 선수들을 발탁하는 강수를 두었고 이 선수들의 활약으로 3연승을 기록하여 역전해 일본 시리즈 정상에 올랐다. 1955년 오프에 구단 사장으로 취임한 시나가와 가즈에는 미즈하라와 서로 뜻이 맞질 않아서 시나가와는 미즈하라를 ‘권위(쇼리키 마쓰타로)에 의지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자, 이에 반발한 미즈하라는 시나가와를 ‘초보인 주제에’라고 비난하는 등 두 사람과의 극한 대립에 치달은 적도 있었다.[30]
이듬해 1956년에도 리그 우승을 달성하면서 일본 시리즈 상대는 라이벌인 미하라 오사무가 이끄는 니시테쓰 라이온스와의 맞대결이 성사되자, 이것을 언론에서(미하라의 요미우리 퇴단 경위를 근거로) ‘간류섬의 대결’이라고 선전했다. 일본 시리즈를 앞두고 요미우리가 유리할 것이라는 하마평이 나돌았지만 이나오 가즈히사, 나카니시 후토시 등 젊은 주축 선수들의 힘에 압도당해 2승 4패로 패했다. 여기서 시나가와는 세대 교체를 위한 조직의 일환으로 팀 개혁을 주장하고 나섰는데 투수 코치 다니구치 고로, 2군 감독 후지모토 히데오, 코치 우치보리 다모쓰의 경질, 히라이 사부로와 미나미무라 유코의 현역 은퇴를 근거로 내세웠다. 미즈하라는 처음엔 반대했지만 후지모토는 투수 코치, 닛타 교이치는 2군 감독, 우치보리는 2군 조감독과 코치진의 인사 이동을 단행하는 것으로 일단락됐다.[30]
1957년에는 리그 우승을 달성했지만 일본 시리즈에서는 계속해서 니시테쓰에게 패했다. 2년 연속으로 일본 시리즈 우승을 놓치자 상대 전적이 1무 4패라는 최악의 성적으로 단 1승도 올리지 못하고 패배했기 때문에 요미우리 내부에서도 미즈하라의 감독 수완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판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시나가와 구단 사장은 후지모토 히데오, 다니구치 고로 등 일부 코치진의 해임과 히라이 사부로, 미나미무라 유코 등 베테랑 선수들을 정리하겠다는 특단의 결정을 내렸는데 이같은 시나가와의 인사 정책에 미즈하라는 강력 반발해 후지모토의 코치직 해임에 반대했다. 같은 해 12월 6일에 미즈하라는 시나가와를 직접 만나서 면담했지만 시나가와의 기분이 변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채고 “코치가 나쁜 것은 감독에게도 책임이 있다. 후지모토를 그만두게 한다면 나도 물러나겠다”라고 사의를 표했다. 요미우리 구단주였던 쇼리키 마쓰타로는 당시 국가공안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미즈하라를 인사원 빌딩 안에 있는 위원장실로 불러냈다. 쇼리키는 시나가와의 코치 해임 인사에 미즈하라에게 신임 코치 인선을 인정하는 것을 조건으로 받아들이도록 명령했고 결국 미즈하라는 사임을 철회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전해들은 시나가와는 미즈하라의 태도에 격노하여 많은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미즈하라, 사과하게”라며 매도했는데 쇼리키의 중재로 겨우 자리를 차지했다.[30] 이 소동을 언론에서는 ‘인사원 소동’(人事院騒動일본어) 또는 ‘'''사과 사건'''’(謝れ事件일본어)이라고 표현하여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결국 후지모토, 다니구치는 경질됐고 미즈하라는 현역에서 은퇴한 나카오 히로시, 히가사 가즈오를 후임 코치로 삼았다.
1958년 일본 시리즈에서는 미하라가 감독으로 있는 니시테쓰와의 세 번째 맞대결이 이뤄졌다. 1차전부터 3차전까지 3연승하여 설욕을 눈앞에 두었으나 4차전이 우천으로 취소됐다. 그러나 경기 시작 전에 비는 멈췄고 경기장의 상태는 경기를 해도 괜찮을 정도였다. 규슈 각지에서 버스로 응원하러 온 팬들을 배려해 니시테쓰측과 요미우리측은 중단 결정의 철회를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4차전을 놓쳤으나 5차전에서는 9회에 1점 차의 리드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대타 고부치 다이스케의 3루 쪽 라인을 타고 날아가는 타구를 누심이었던 니데가와 노부아키가 페어로 판정한 것에 미즈하라와 3루수 나가시마 시게오가 파울이라고 항의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그 후 세키구치 세이지가 중견수쪽에 적시타를 때려내 동점이 되면서 연장전으로 진행됐다. 결국 10회말 이나오 가즈히사의 끝내기 홈런(일본 시리즈 사상 최초)으로 팀은 패했다. 또한 6차전에서 니시테쓰가 선발을 변경하는 행위(당시에는 경기 전날에 선발 명단을 발표했다)를 시도하자 이를 둘러싸고 양팀이 신경전을 벌였는데 커미셔너인 이노우에 노보리를 사이에 두고 태연히 앉아있는 미하라와 물고 늘어지는 듯한 표정의 미즈하라가 대치하고 있는 사진이 남아 있다. 이 소동으로 경기 개시가 늦춰지면서 본래 선발이던 후지타 모토시가 1회에 나카니시 후토시를 상대로 결승타가 되는 선제 2점 홈런과 이나오의 4연투 4연승의 활약으로 패하면서 니시테쓰에게 사상 첫 3연패 후 4연승을 허용했다. 미즈하라는 우승을 놓친 데 대한 책임으로 사의를 표명했지만 이에 대해 시나가와는 “이대로 물러서게 된다면 자네는 패배다. 이렇게 되면 어떻게든 니시테쓰를 꺾는 것이 진정한 사나이가 아닌가”라고 만류했다. 시나가와가 자신을 위로해준 것에 대해 미즈하라는 눈물을 흘리며 들었다고 한다.[31]
1958년 시즌 종료 후 투수였던 벳쇼 다케히코가 계약을 갱신할 당시 등판 전체의 보장을 요구한 것에 대해 “선수의 기용은 감독의 전권 사항”이라고 정면으로 비판했다. 이 갈등은 언론에 크게 보도될 정도로 화제를 모았으나 벳쇼가 결국 사과하며 잘못을 인정했고 미즈하라도 가능한 만큼 벳쇼의 의사를 존중해주는 선에서 마무리됐다. 그동안 통산 294승을 거둔 벳쇼는 빅토르 스타루힌이 갖고 있던 통산 최다승 기록(303승) 경신을 목표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등판 기회를 늘리고 싶어했던 의도가 담겨있었다.
이듬해 1959년에도 리그 우승을 이끌었만 이번에는 스기우라 다다시가 소속된 난카이 호크스에게 내리 4연패를 당하며 일본 시리즈 우승 달성에는 실패했다. 일본 시리즈는 1958년 4차전부터 이듬해 1959년 4차전까지 8연패를 당하면서 요미우리 감독으로서는 하라 다쓰노리(2020년)가 9연패로 경신되기 전까지는 최악의 기록이었다.[32]
1960년에는 미하라가 같은 센트럴 리그 소속인 다이요 웨일스의 감독으로 취임하자 언론에서는 ‘간류섬의 대결’이 다시 돌아왔다고 선전했다. 미하라는 6년 연속 최하위였던 다이요를 숙련된 선수 기용으로 팀 전력을 끌어올려 요미우리와 우승 경쟁을 펼쳤지만 요미우리는 결국 다이요에 굴복해 리그 우승을 놓치고 2위로 떨어졌다. 미즈하라는 팀의 리그 우승이 무산된 10월에 경기 종료 후 사진 기자가 집요하게 사진을 찍은 것에 불만을 품고 그 사진 기자를 폭행해 필름을 받아냈다. 그 결과 미즈하라는 5년 연속 일본 시리즈 우승을 놓치는 결과를 남겼고 쇼리키의 미즈하라에 대한 평가도 하락해 ‘그라운드에서의 치욕은 그라운드에서 갚는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그해 11월 19일에 요미우리 감독직에서 사임했다. 이는 실질적인 해임으로 같은 해 시즌 종료 후 당시 다카하시 구단 사장으로부터 해임됐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동시에 프런트로부터 잔류 요청을 받았지만 월급은 반값인 100000JPY을 제시받자 미즈하라는 이에 불복했다. 구단에 남는다면 공로금 1000만엔도 보장해주겠다는 제안도 들어있어서 부인과 상의했지만 부인은 ‘그런 굴욕은 없잖아요’라며 남편에게 거절하라고 했다. 결국 퇴단을 택했고 공로금은 지급되지 않았다.
요미우리의 감독을 마지막으로 지휘했던 1960년에는 투수진의 부진도 있었기 때문에 신인이던 호리모토 리쓰오를 69경기에 등판하여 29승 18패의 성적으로 대활약을 하는 등 신인왕을 차지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투구로 인하여 어깨에 무리가 갈 정도의 상태가 악화돼 투수로서 생활한 지 6년 만에 은퇴했지만 호리모토가 은퇴할 때 미즈하라는 “자네에겐 정말 미안한 일을 하고야 말았다. 내가 자네의 선수 생활을 단축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좀 더 생각하고 나서 자네를 등판시켰다면 자네는 더더욱 돈을 벌 수 있었을 텐데…”라고 말했다고 한다. 호리모토는 “나는 미즈하라 감독님의 이 한마디에 마음의 짐을 덜었다”라고 말했다.[33] 당시 요미우리의 선수였던 히로오카 다쓰로는 한두 명의 걸출한 선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내다보고 투수진의 정비와 기용이 필요하다고 기술했다.[33]
3. 지도자 경력
홈런
타율
평균자책점